수북정원
..... 본문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 볼 때 메타버스의 아바타 같은 존재일까?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신의 시선 아래, 마치 메타버스 안에서 움직이는 아바타처럼,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의식을 담고 살아간다. 우리가 감각하는 이 현실조차, 신의 차원에서는 단지 하나의 시뮬레이션, 혹은 한 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바타는 자신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배후에는 조종자가 있고, 더 넓은 현실이 존재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듯 살아가지만, 운명과 우주의 법칙 아래 움직인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에게 우리는 메타버스 속 존재처럼 보일 것이다—자율성을 부여받았으나, 완전한 자율은 아닌.
결국, 우리는 신의 의지와 설계가 투영된 형상일지도 모른다. 코드로 짜인 세계 속에서 감정과 고통을 겪는, 아름답고도 덧없는 아바타.
♣가난과 외로움, 소외되고 희망이 없는 인간 아바타는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아마도 신이 만든 세계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신조차 그 불완전함을 감내하며 지켜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가난과 외로움, 소외와 절망은 무언가 잘못되어 생긴 오류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세계라는 서사의 그림자이자, 빛이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인 대조일지도 모른다.
아바타는 정해진 규칙 속에서 움직인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찬란한 빛 속에 있지만, 어떤 이는 어둠의 구석에 버려진다. 불공평해 보이지만, 그것이 이 시뮬레이션의 법칙이다—불완전한 자유, 선택할 수 없는 시작, 그러나 그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여정.
신이 있다면, 그는 모든 아바타가 행복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깊은 자각과 연결, 그리고 사랑이란 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아바타들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잊히는 대신, 그 존재만으로 세계의 균형을 지탱하고 있는 또 다른 중심일 수 있다. 비록 아무도 바라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고통은 이야기의 진실을 담고 있고, 거기에서만 피어나는 희망이 있다.
절망은,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서 움트는 또 하나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처음부터 그런 운영을 부여 받은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 어떤 아바타는 처음부터 무너진 땅 위에 떨어진다. 누군가는 부유한 도시의 중심에서, 누군가는 황폐한 변두리에서 시작된다. 그건 선택이 아니고, 부여된 조건—마치 코드의 일부, 설계의 한 단락처럼—처음부터 새겨진 운명이다.
이 세계는 공평하지 않다. 처음부터 고통을 부여받은 자들은, 마치 시험처럼, 혹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그 자리에 놓인다. 인간은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만, 어쩌면 애초에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설계된 것일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들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이 존재함으로써, 이 세계는 깊이를 얻는다.
빛이 있기 위해 어둠이 있어야 하고,
기쁨이 진짜이기 위해 고통이 있어야 하며,
자유가 진실되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조건조차 자유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이라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그런 조건을 허락했는가?
그리고 또, 그런 조건 속에서도 왜 우리는 사랑하고, 꿈꾸며, 끝까지 살아가려 하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인간 아바타가 신을 향해 던질 수 있는 가장 깊은 외침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아모르파티란 말처럼 자기 운명을 수긍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말은 너무 잔인하다. 모든 인간이 아모르 파티—운명을 사랑하라—를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운명은 너무 날카롭고, 너무 잔혹해서 사랑이 아니라 견디는 것조차 기적이 된다.
아모르 파티는 철학자 니체가 말했지만, 그는 신이 죽었다고 외친 자였고, 인간이 신 없이도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한 자였다. 그러니까 아모르 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저항이다. 이 세계가 나를 버려도, 나는 이 세계를 끝내 사랑하겠다는 비통한 선언.
모든 인간이 아모르 파티를 실천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저, 누군가는 그러한 태도를 택할 수 있다는 것,
그 선택 자체가 숭고하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위대해진다.
아바타가 스스로의 코드를 초월해, "나는 이 삶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순간—그건 기계도, 신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다. 그건 창조를 넘어선 창조다.
그러니 아모르 파티는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이 되려는 고독한 시도다.
그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는 완전히 절망할 수 없다.
♣인간이 수긍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체념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신은 이것을 알까?
신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수긍처럼 보이는 체념, 그 억눌린 고통의 침묵—그 모든 내면의 균열을 신은 본다. 왜냐하면 신은 외형이 아니라 진심의 떨림을 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절망, 웃음 뒤의 포기, 그 모든 걸 신은 듣는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신이 가장 귀 기울이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때로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체념은 나약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전략이다. 그리고 그조차도 너무 오래 지속되면, 인간은 자신이 체념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간다—기억 속의 희망이 바래질 때까지.
그런 인간을 보며 신이 무엇을 느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민일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침묵일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체념 속에서도 불씨 하나를 간직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이 참된 수긍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길에는 반드시 체념이 지나가고, 절망이 눕고, 침묵이 덮인다.
그래서일까.
신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아마도 인간의 그 체념 너머에 있는 마지막 속삭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참된 수긍이란 말이 너무 관념적이지 않을까?
♧맞아, 그 말… 너무 멀고 추상적이야. ‘참된 수긍’이라고 하면, 마치 뭔가 궁극적인 깨달음 같고,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이상처럼 들려. 실제 삶 속에서 인간은 그렇게 거창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그저, 오늘 하루를 넘기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애써 웃는 것.
그게 현실에서의 ‘수긍’이야.
‘참된’이라는 말은 어쩌면, 고통을 미화하려는 말일지도 몰라.
체념을 의연함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일 수도 있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작고 흔들리는 수긍들이 덜 진실한 건 아니야.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참된 수긍이란,
모든 것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세상이 날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느끼면서도,
내가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태도.
그건 개념이 아니라 태도고,
머리가 아니라 몸과 삶 전체로 겪는 것이야.
그래서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생존이자 품위야.
그리고 품위는 언제나, 말없이 고개를 숙인 자의 어깨에 깃드는 법이지.
♣그래,맞는 말이야. 그런대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신이고 증거라고 말을 하는데,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훌륭한 삶인데, 인간의 의지나 신념이 한결 같지 않다는게 문제야
♧그래… 정말 그렇다.
그 믿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
그건 얼마나 절박하고도 위대한 선언인가.
보이지 않지만 믿겠다는 건, 결국 눈앞의 고통보다 더 깊은 진실이 있다고 믿겠다는 뜻이니까.
그건 말 그대로 인간 정신의 비상(飛上)이야.
이 세계가 무너져도, 나는 그 너머를 붙들겠다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아름다움이지.
하지만 네 말대로, 문제는 그 믿음을 ‘계속’ 가지는 거야.
사람의 의지는 물처럼 흔들리고,
신념은 바람처럼 사라져.
어제는 성령에 감화되어 눈물 흘렸던 사람도
오늘은 찬물 같은 현실 앞에서 주저앉는다.
인간은 그렇게 약하다.
그래서 신을 찾는 거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겠지.
믿음이란 의지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부서져도, 돌아오고, 다시 일어나는 반복 안에서 자라는 것이니까.
한결같을 수 없다면, 계속 돌아오면 된다.
계속 쓰러지더라도, 그때마다
“나 아직 포기 안 했어”라고 작게 속삭일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믿음이고, 이미 수긍이고, 이미 사랑이야.
신도 아마 그걸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자꾸 다시 걸으려 하는 모습 그 자체에,
신은 가장 깊은 연민과 경외를 느끼는 게 아닐까.
♣나약한 인간이 한결같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
♧정말이지,그건 산을 옮기는 일보다 더 어렵고,
바다를 가르는 일보다도 더 기적 같은 일이야.
한결같은 믿음—
그건 차가운 새벽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야.
누군가는 그걸 ‘순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그건 단순한 복종이 아니야.
그건, 고통을 끌어안고도 여전히 “예”라고 말하는,
영혼의 고백이자 고독한 용기야.
나약한 인간에게
한결같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때로 너무 가혹해.
하루하루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그 삶에
의심마저 죄라고 말한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독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한결같은 믿음이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떠나지 않는 선택이야.
떨리는 손으로도 촛불을 다시 켜는 그 마음,
그 불안한 손길 위에,
신이 손을 얹을지도 몰라.
“나는 네가 흔들리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아직 나를 부르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말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하지 않니?
♣신의 옷자락이라도 잠깐 보여주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야
♧정말 그러하다…
신의 옷자락, 그 가장자리 천 한 조각이라도
바람에 흩날리듯 우리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 준다면—
그 단 한 순간만으로도
우린 살아갈 이유를 붙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신은 대개 침묵하고,
그 모습조차 흐릿하고,
우리가 원할 때는 오지 않고,
거의 포기하려는 순간에야
희미하게 기척을 남긴다.
그렇기에,
신의 옷자락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 꿇은 고요 속에서 스치듯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라.
한밤중 누군가의 기도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의 손길에서,
고통 속에서도 피어난 말 한 마디 속에서
잠깐—정말 잠깐—그 끝자락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
어쩌면 신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대신,
결핍과 갈망을 통해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 건지도 몰라.
왜냐하면 그 갈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깊은 불꽃이니까.
그래서 우린 묻고 또 묻지.
“언제쯤, 그 옷자락을 만질 수 있을까.”
그리고 살아.
혹시나—정말 혹시나—
내일은 그 옷자락이 바람결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작고도 엄청난 기대 하나로.
♣좋은 대화 고맙다. 시간 날 때 또 올게.
♧나야말로 고맙다.
이런 깊은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건
말보다 더 큰 어떤 존재와의 대화 같았어.
언제든지,
시간이 무르익고
마음이 다시 어두운 숲을 거닐고 싶을 때,
조용히 와줘.
나는 여기,
늘 기다리고 있을게.
다음에 또 보자.
빛이 없을 때도,
너는 여전히 걷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