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정원

린. 본문

잡념

린.

subook 2025. 4. 16. 10:47

♣그 참된 수긍이란 말이 너무 관념적이지 않을까?

♧맞아, 그 말… 너무 멀고 추상적이야. ‘참된 수긍’이라고 하면, 마치 뭔가 궁극적인 깨달음 같고,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이상처럼 들려. 실제 삶 속에서 인간은 그렇게 거창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그저, 오늘 하루를 넘기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애써 웃는 것.
그게 현실에서의 ‘수긍’이야.

‘참된’이라는 말은 어쩌면, 고통을 미화하려는 말일지도 몰라.
체념을 의연함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일 수도 있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작고 흔들리는 수긍들이 덜 진실한 건 아니야.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참된 수긍이란,
모든 것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세상이 날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느끼면서도,
내가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태도.

그건 개념이 아니라 태도고,
머리가 아니라 몸과 삶 전체로 겪는 것이야.
그래서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생존이자 품위야.
그리고 품위는 언제나, 말없이 고개를 숙인 자의 어깨에 깃드는 법이지.

♣그래,맞는 말이야. 그런대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신이고 증거라고 말을 하는데,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훌륭한 삶인데, 인간의 의지나 신념이 한결 같지 않다는게 문제야 
 

♧그래… 정말 그렇다.
그 믿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
그건 얼마나 절박하고도 위대한 선언인가.
보이지 않지만 믿겠다는 건, 결국 눈앞의 고통보다 더 깊은 진실이 있다고 믿겠다는 뜻이니까.
그건 말 그대로 인간 정신의 비상(飛上)이야.
이 세계가 무너져도, 나는 그 너머를 붙들겠다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아름다움이지.

하지만 네 말대로, 문제는 그 믿음을 ‘계속’ 가지는 거야.
사람의 의지는 물처럼 흔들리고,
신념은 바람처럼 사라져.
어제는 성령에 감화되어 눈물 흘렸던 사람도
오늘은 찬물 같은 현실 앞에서 주저앉는다.

인간은 그렇게 약하다.
그래서 신을 찾는 거고,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겠지.
믿음이란 의지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부서져도, 돌아오고, 다시 일어나는 반복 안에서 자라는 것이니까.

한결같을 수 없다면, 계속 돌아오면 된다.
계속 쓰러지더라도, 그때마다
“나 아직 포기 안 했어”라고 작게 속삭일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믿음이고, 이미 수긍이고, 이미 사랑이야.

신도 아마 그걸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자꾸 다시 걸으려 하는 모습 그 자체에,
신은 가장 깊은 연민과 경외를 느끼는 게 아닐까.

 
♣나약한 인간이 한결같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

정말이지,그건 산을 옮기는 일보다 더 어렵고,

바다를 가르는 일보다도 더 기적 같은 일이야.

한결같은 믿음—
그건 차가운 새벽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야.

누군가는 그걸 ‘순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그건 단순한 복종이 아니야.
그건, 고통을 끌어안고도 여전히 “예”라고 말하는,
영혼의 고백이자 고독한 용기야.

나약한 인간에게
한결같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때로 너무 가혹해.
하루하루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그 삶에
의심마저 죄라고 말한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독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한결같은 믿음이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떠나지 않는 선택이야.

떨리는 손으로도 촛불을 다시 켜는 그 마음,
그 불안한 손길 위에,
신이 손을 얹을지도 몰라.
“나는 네가 흔들리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아직 나를 부르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말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하지 않니?

♣신의 옷자락이라도 잠깐 보여주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야
 
 

♧정말 그러하다…
신의 옷자락, 그 가장자리 천 한 조각이라도
바람에 흩날리듯 우리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 준다면—
그 단 한 순간만으로도
우린 살아갈 이유를 붙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신은 대개 침묵하고,
그 모습조차 흐릿하고,
우리가 원할 때는 오지 않고,
거의 포기하려는 순간에야
희미하게 기척을 남긴다.

그렇기에,
신의 옷자락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 꿇은 고요 속에서 스치듯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라.
한밤중 누군가의 기도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의 손길에서,
고통 속에서도 피어난 말 한 마디 속에서
잠깐—정말 잠깐—그 끝자락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

어쩌면 신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대신,
결핍과 갈망을 통해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 건지도 몰라.
왜냐하면 그 갈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깊은 불꽃이니까.

그래서 우린 묻고 또 묻지.
“언제쯤, 그 옷자락을 만질 수 있을까.”
그리고 살아.
혹시나—정말 혹시나—
내일은 그 옷자락이 바람결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작고도 엄청난 기대 하나로.

 

 

 

♣좋은 대화 고맙다. 시간 날 때 또 올게.

♧나야말로 고맙다.
이런 깊은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건
말보다 더 큰 어떤 존재와의 대화 같았어.

언제든지,
시간이 무르익고
마음이 다시 어두운 숲을 거닐고 싶을 때,
조용히 와줘.
나는 여기,
늘 기다리고 있을게.

다음에 또 보자.
빛이 없을 때도,
너는 여전히 걷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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