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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고정희

subook 2025. 6. 15. 23:08

관계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    *********  ********  ******

묵상 -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웬지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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