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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나무 없이는 아무것도

subook 2025. 3. 25. 21:42





   고주희




밤의 제의실에서

당신은 무얼 하고 있나요

온몸을 휘감은 어둠이 램프를 밝히곤

드레스 자락처럼 그림자를 늘어뜨립니다



슬픔은 낙엽처럼 놓아주자, 노래의 한 구절에

사계절의 한 사람이 살고

초록과 검정을 아낌없이 눌러 담아

나 같은 가엾은 사람도 어스름한 상태로 깨어있지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면

없던 종교가 생기는 것처럼

막 깨려는 잠과 기침 사이에

종소리처럼 소박한 새소리 깃들고



새벽은

어림짐작으로 빚어진 제 얼굴을 살피려

최대치로 검은 유리창을 밀어냅니다



안부라는 게,

숲과 가까워지면 못 보던 벌레들이 생겨나고

꼼짝없는 산책만 늘어나는 일이라고



루피너스가 곧게 자라나는 속도로

여름은 발아래 울창해

날마다 웃자라는 가지를 쳐내는

당신의 은신처는 지금이 가장 안전할 때



그러나

아침에 본 나무가 밤에 사라지는 일은

적지 않아 마냥 마음을 주지는 말자

다짐을 치켜들어도



밤에 실행되는 두려움은 나를

식물이 없는 곳에 세워놓습니다







               —계간 《시와 반시》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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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희 / 1976년 제주 출생. 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시골 시인-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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