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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안상학

subook 2025. 3. 20. 13:53

설중매(雪中梅)

 

    안상학



지금 여기서 내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든지 꽃으로 피어서 눈을 맞든지


나는 꽃으로 향기로울 때

잎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잎으로 푸르를 때

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금빛 열매를 달았을 때

향기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목으로 동토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잎이었고 열매였고 나목이었고 또 나는 꽃이었다가 향기였다가 잎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나목이었다가 또 나는 꽃이었으니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기쁨을 노래한 적 없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슬픔을 노래한 적 없다


나목이 나목을 잃고 꽃이 꽃을 잃고 열매가 열매를 잃고 잎이 잎을 잃고 향기가 향기를 잃을 때에도


꽃에 앞서 잎을 내세운 적 없다 잎에 앞서 열매를 열매에 앞서
나목을 나목에 앞서 꽃을 꽃에 앞서 향기를 내세운 적 없다


내가 눈 속에서 향기를 피우든지 향기로 피어 눈을 맞든지


나는 다만 수많은 하나의 지금

무수한 하나의 여기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2023 봄, 200호


설중매


...................



경자 윤사월


   안상학


이 여름에 죽는 사람들은

지난봄이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 수 있나

군산 어청도에는 분홍찌르레기가 날아왔다는데

산티아고엔 퓨마가 순례를 한다는데

보고타의 거리엔 여우가 활보를 한다는데

오뉴월 개도 안 걸리는 이상한 감기에 걸린 사람들은

오는 가을 하늘이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 수 있나

지중해에는 고래가 돌아왔다는데

카르타헤나만에는 돌고래가 돌아왔다는데

남아공 어느 거리에선 사자가 낮잠을 잔다는데

이 여름에 죽는 사람들은

오는 겨울 첫눈이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 수 있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는 적적한 거리

안 읽은 메일이 쌓여 있는 적막한 공원

거두지 않은 우편물들이 꽂혀 있는 적요한 상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피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드는 쪽은 인간들뿐

나라현의 지하철엔 사슴들이 배회한다는데

산펠리페 해변엔 너구리들이 산책을 한다는데

롭부리 어느 거리에선 원숭이들이 패싸움을 한다는데

이 여름에 죽는 사람들은

다시 오는 봄이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 수 있나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우는데*

윤사월 밤은 짧다 소쩍새 울어 쌓는데

얼굴을 가리고 문을 닫아걸고 임종도 없이 문상객도 없이

이 여름에 어떻게 죽을 수 있나

남은 세월 아까워서 어떻게 죽어갈 수 있나

 

*박목월 시 「윤사월」 변용

            ⸺계간 《동리목월》 2020년 겨울호

.................


북녘 거처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형제자매처럼 무학을 다짐하던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 곳
불알친구는 십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 내렸던 아배도 오래 전 소식 없고
식모 살던 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벌써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내 삶의 가장 먼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계간 《발견》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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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

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

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

그저 별 다른 얼굴 없다는 듯

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

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있는 나무의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현대시학》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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