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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일기 외

subook 2025. 5. 21. 21:28

황혼일기


고정희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에 나는 차분하지못하여

그 집의 너른 유리창가에 앉으면

바람부는 창밖은 딴 세상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잔조롭게 흔들리는 산목련 줄기 사이로

획 가로지르는 새도 새려니와

불그레 불그레 물드는

찔레꽃 이파리를 무심히 바라보면

울컥하고 치미는 눈물 또한 어쩌지 못했다

후르르 후르르 산목련 줄기에서 흔들리는 건

산목련잎이 아니라 외줄기 내 영혼이었기

기댈 곳 그리운 내 정신이었기

오래 오래 나는 울었다

 

어둠이 완전히 창을 지워버렸을 땐 

넋장이 무너지듯 내 이름도 깊어져

하염없는 슬픔으로 어깨기침을 했다

누군들 왜 모르랴

어두워지는 건 밤이 아니라

속수무책의 한 생애

무방비 상태의 우리 희망이거니

그 집의 주인은 조용히 다가와

너른 창에 커튼을 내리고 

내 좁은 어깨를 따뜻이 감쌌다

(새도 날기 위해 날개를 접는 거란다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말야!)

문득 신경통에 좋다는 골담초 꽃멍울이

건들건들 흔들리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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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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默想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 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