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

권대웅

subook 2025. 6. 6. 18:44

집시의 시간



권대웅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했다

이마에 손을 얹고

밝아도 어두운 저 먼 길의 넋을

바라보아야 했다



노을이 흘러가는 것처럼 방랑이란

유예받은 날들을 사는 것이어서

빛나도 외로운 별들과

펄럭거려도 승리라는 것은 없는

깃발들이 나부끼고 흐느끼는

집을 메고 집을 찾으러 다녀야 하는

집시의 날들



신을 신어도 언제나 맨발인

저녁 불빛에는 모래가 섞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속에서 목쉰 여자의 노래가 들렸다



사랑을 잃은 노래

목젖을 밟고 어그적어그적

걸어나오는 불빛들이 따가워

늘 눈이 젖어 있는 모래의 남자가

네온싸인 아래 비틀거린다



태어날 때부터 발을 헛딛고

허공을 유랑하는 떠돌이별의 통증이

박하처럼 환하다



꿈속에서도 발을 잃고 떠나야 하는 밤

시베리아 횡단하는 기차보다 긴

집시의 시간이

천막 지붕위에 엎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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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살던 집


권대웅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生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어떡하지 그만 깜빡 잊고

여기서 이렇게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같은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갈 수 없는 당신 집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햇빛에 눈부셔 자꾸만 눈물이 날 때

갑자기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노을이 붕붕 울어댈 때

순간,불현듯,화들짝

지금 이 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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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갈피로 햇빛이 지나갈 때


권대웅



햇빛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늑골이 아팠다

온몸 구석구석 감추어져 있던

추억 같은 것들이 슬픔 같은 것들이

눈이 부셨나보다 부끄러웠나보다



접혀 있던 세월의 갈피,갈피들이

어느 날 불쑥 펼쳐져

마치 버려두고 왔던 아이가 커서

찾아온 것처럼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문득 돌쩌귀를 들추었을 때

거기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

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물지 않고 살아 있는 생채기로

시린 바람이 지나가듯이 자꾸 옆구리가 결렸다

기억의 갈피갈피 햇빛이 지나갈 때

남겨진 삶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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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갈피


권대웅



시간과 시간 사이에 난 길

새벽 다섯시와 여섯시 사이의 샛길



오전 열시와 열한시 사이의 섬

오후 두시와 세시가 만나는 눈부신 여울목

저녁 여섯시에서 일곱시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우두커니와 물끄러미



그 시간이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울음

혼자서만 너무 그리워했던 눈빛

억장이 무너져 쌓인 적막



꽃들의 그림자와 떠나지 못한 햇빛들

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

저쪽으로 가지도 않으며

현재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서성거리는 응어리



그 시간의 갈피에 숨어 살고 있는 것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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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길 저쪽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란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속에는 아직도 솜틀집하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 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 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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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도 없이 못 견디게 그리운 저녁..



계절에도 늑골이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햇빛이 자리를 바꿀 때마다

가려졌던 젖은 기억들이 드러나

부끄러울 때가 있다

따가울 때가 있다



모두가 그것을 감추고 살지만

봄이 목이 메도록 짙은 철쭉을 데려오고

여름이 훌쩍 해바라기를 데려가듯이

떠나간 것들이 다시 오고

다시 온 그 무엇 때문에

못 견디게 외로울 때가 있다



때로 어떤 저녁

지나가는 바람에 묻어 있는 냄새에

오래 비어 있는 적산가옥 같은 것

저녁의 뒤란 같은 것

마당에 가뭇가뭇 꺼쳐가는 짚불 같은 것



그곳에서 살았던 사랑했던 기억이

잠깐 떠오르려다가

후다닥 먼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떠나고 다시 오며 바뀌어가는 것들

그렇게 우리는

어떤 거대한 바퀴에 실려갔다가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서로가 그리운 계절에 다시 온 건 아닐까



가끔씩 그 사이가 보이고

목에 걸린 작대기 같은 그 기억 때문에

못 견디게 외로운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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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불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의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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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기억이 있다

당신을 적셨던 사랑



아프지만 아름답게 생포했던 눈물들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 건널목에서

비 맞고 서 있던 청춘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마다



기우뚱 하늘 한구석이 무너지고

그 길로 젖은 불빛들이 부푼다



흐린 주점에서 찢었던 편지들이

창문에 타자기의 활자처럼 찍히는

빗방울의 사연을 듣다보면

모든 사랑의 영혼은 얼룩져 있다



비가 그치고

가슴이 젖었던 것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몸으로 젖었던 것들만이 잊힐 뿐이다



밤거리를 맨몸으로 서성거리는 빗방울들

사랑이 떠나간 정거장과

쇼윈도와 창문과 나무들의 어께 위로



구름과 놀던 기억들이 떨어진다

국화 허리 같은 당신이 떨어진다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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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가을 저녁의 詩



떨어지는 것은 나뭇잎만이 아니다

맨발로 뛰어다니는 빗방울

불빛에 부푼 추억의 머리카락



아직 쓰지 못한 시와

내가 부둥켜안고 사랑했던 날들

눈물들



거리는 언제나 정처 없다

낙태한 아이들처럼 흘러가는 구름과

마음에 젖어 배회하는 그림자들



창문을 두드리는 것은

저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끝

돌 속같이 딱딱하고 보이지 않는

그곳은 어디일까